매니페스토 선거가 불가능한 대한민국
매니페스토의 원조는 영국이다. 영국은 이념과 노선에 따른 보수당-노동당의 양당체제가 확립되어있기 때문에 영국의 매니페스토는 바로 '정당의 정책선거'이다. 지금으로부터 172년 전인 1834년부터 시작된 영국의 매니페스토는 정당정책과 이념에 따른 유권자들의 선택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기준이다.
예를 들어 청년실업 문제의 경우 노동당의 매니페스토 조항을 보면 '우리 노동당은 임기 5년 이내에 청년실업자 25만명을 해결하겠다' 며 그 방법과 예산, 기한, 로드맵이 아주 구체화 되어 있다. 이러한 공약은 5년 후에 선거에서 다시 평가를 받는 시스템이 정착되어 있다. 매니페스토 공약집은 우리 돈으로 한권에 만원 정도의 가격인데, 100만부나 팔리며, 영국 유권자들이 이 책자를 보고 자연스럽게 양 정당의 정강정책을 비교하는 토론이 일상화 돼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불과 3년 전인 2003년도에 매니페스토가 도입되었지만, 후보자 중심으로 정착되어 있다. 파벌정치, 금권·관권선거가 극심한 당시 상황에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자는 국민적 여론이 있었는데 이걸 해결해준 것이 매니페스토였다.
실현 가능하고 수치 예산이 포함된 아주 구체적인 공약으로 유권자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얻어 당선된 사례가 나타나면서 2003년도에 일본에서 가장 유행했던 단어 1위가 매니페스토였다.
예를 들면, 가나가와현의 마쓰지와 지사의 공약집을 보면 육아보육 문제의 경우 현재 우리 현의 보육시설수는 143대 1로 전국 최하위다, 이것을 1.5배인 220개로 늘려나가겠다, 기한은 2006년까지 하겠다, 예산은 30억엔 정도 드는데 이 예산은 어떻게 조달하겠다'는 식으로 구체화 되어 있다. 일본에서도 이런 공약집을 후보자는 유권자에게 판매하거나 배포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매니페스토에 입각한 정책공약을 만들어도 유권자에게 알릴 수 없다. 보통 12쪽 짜리 선거공보에서 정책공약은 불과 2쪽에서 4쪽 정도 싣는 것이 고작이다. 선거 때마다 정당과 후보자들은 정책선거를 하겠다, 매니페스토 운동을 모범적으로 실천하겠다고 약속하지만 실현되지는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작년 서울시장 TV 토론에서 모 후보가 상대 후보에게 '언론기사를 보면 이런 공약을 말씀하셨던데...'라고 질문을 하면 '그 기사는 잘못 나온 것입니다'라고 답변하는 코미디가 연출된다. 어떤 후보도 문서화된 공약집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인가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보장하는 국가이다. 그러나 정치와 선거에 있어서는 기득권을 가진 현역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정치 신인간의 철저한 불공정 시장이다. 이러한 불평등한 선거 시장에서는 원천적으로 '신상품'(정치신인) 소개가 불가능해 소비자는 '익숙한 상품'(현역)만 선택하게 되어 있고, 그 잘못된 선택 때문에 4년간 고통을 받아야 한다.
정치 신인은 현행 제도 하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사전선거운동이 허용되기 전까지는 자신의 출마의사를 공공연하게 밝히는 것도 불법이다.
임좌순씨가 2005년년 2월 국회 정치개혁특위에 제출한 '선거운동의 합리적 개선방안'이라는 정책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사전선거운동을 제한하는 나라는 일본과 우리나라 밖에 없다.
미국 상원 의원인 힐러리 로뎀은 선거 18개월 전에 출마선언을 하고, 아무런 제약 없이 가가호호 방문 등 유권자와 꾸준하게 소통을 했다. 미국 민주당은 평상시 정당 활동에 참여하는 열성적인 자원봉사자가 100여만명이지만, 후보 선출을 위한 예비경선에 참여하는 지지자들은 2000여만명에 이른다. 유권자와 후보자가 서로를 잘 알기 때문에 우리 정당의 대표자를, 우리 동네의 일꾼을 뽑는데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선거문화 개혁의 핵심은 후보자와 유권자가 상호 소통을 확대하는 것이다. 후보자는 자신의 철학이나 비전을 유권자에게 충분히 전달할 수 있어야 하고, 유권자는 후보자의 자질과 능력 등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가져야 한다.
사전선거운동을 허용하면 조기 과열현상이 빚어질 것이라는 시각은 현역 중심의 기득권자의 입장이다. 이미 유권자 의식이 돈과 조직선거를 허용하지 않는다. 돈과 조직을 묶되, 자질과 비전을 겨루는 선의의 경쟁을 풀어주어야 한다.
지역문제에 대한 비전과 공약 경쟁은 과열될 수록 좋은 것이다. 적어도 지역일꾼이 되고자 하는 후보라면 지역주민의 애로사항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후보를 통해 유권자가 지역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누가 더 좋은 지도자인지 충분한 정보를 가질수록 지방자치와 우리 정치는 발전하게 된다.
공천비리, 묻지마 투표, 감성정치가 난무한 작년 지방 선거를 계기로 다가오는 대선과 총선에서는 선거와 정치가 불신의 대상이 아니라 유권자가 중심이 되는 생활정치가 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