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페스토' 애시당초 불가능했다

[5·31 그 후 ⑧] 정치 컨설턴트가 현장에서 본 5·31 지방선거
  정창교(news) 기자    


5·31 지방선거 결과가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역탄핵'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얻은 동력이 되었던 대통령 탄핵 역풍을 빗댄 말이다. 여당은 처참하게 졌고, 한나라당은 완벽하게 이겼다. 유권자들이 이런 선택을 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번 선거결과가 향후 정치지형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에 <오마이뉴스>는 정치빅뱅까지 몰고 올 수 있는 정국에 대한 분석과 진단, 전망에 대한 글을 몇 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이러한 '정치평론'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누리꾼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린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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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중한 한표 행사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일인 5월 31일 한 유권자가 투표함에 투표 용지를 넣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수도권 모 지역 광역의원 선거에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민주당 후보가 출마했다. 후보자가 난립하는 다른 선거구에 비해 단 3명만 출마해서 비교적 단순한 구도였다.

가 후보(열린우리당)는 시민운동가 출신으로 그 지역에서 기초의원을 지냈고, 민주노동당이 후보를 내지 않고 지원할 정도로 신망을 받고 있었다. 반면에 나 후보(한나라당)는 그 지역에서 관변단체 대표를 지냈지만 이번에 처음 출마한 사람으로 약체로 평가받고 있었다.

'전과자'들의 대결

특히 대비되는 것은 두 후보자의 전과 기록이다. 가 후보는 과거 학생운동 시절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전과자로 '민주화운동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나 후보는 방화범으로 실형을 살았던 전과가 있었다. 사실 나 후보는 이런 전과가 문제가 되어 공천 과정에서도 말이 많았었다.

공직 후보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도덕성을 비교할 수 있는 전과기록은 선거공보 2면에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가 후보는 유권자들이 그 사실만 알아도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뒤늦게 공천을 받은 나 후보는 눈에 띄는 선거운동도 하지 않은 반면 가 후보는 그 지역 현안 이슈를 전면에 부각시켜 선거캠페인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광역의원 후보에는 단 세 사람만 출마했지만, 광역단체장부터 기초의원까지 포함해서 그 지역에 붙은 선거벽보는 25장이었다. 각 가정으로 배부된 선거공보는 200여 페이지가 넘었다.

가 후보는 나 후보와 둘이 경쟁하면 이긴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을 포함해 25명의 후보자의 홍수에 묻혀 버렸다. 가 후보는 변변히 자신을 알리지도 못한 채 '전과'를 묻지 않고 '당'을 보고 찍는 바람에 압도적 표차이로 패배하고 말았다. 후보자의 인물과 정책을 묻지 않고 오로지 정당을 보고 몰표를 던지는 '바람 선거'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런 사례는 비단 이번 선거 때만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작년 4·30 국회의원 재선에서 충남 아산 선거구에 출마한 임좌순 후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선거법 박사'도 당하는 선거법

임좌순 후보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장관급)을 지낸 사람으로 중앙 정치권에서는 유명한 사람이지만 지역에서는 낮선 사람이다. 반면 한나라당의 이진구 후보는 30대부터 출마하여 이번에 7번째 도전한 인물로 지역에서는 잘 알려진 인물이다.

선거 직전에 조사한 지역 인지도는 임좌순 후보 25.3%, 이진구 후보 60.3%였다. 특히 투표 참가율이 높았던 40대 이상 중장년층에서는 그 격차가 더욱 컸다. 결국 임 후보는 자신을 제대로 알리지도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선거를 마쳐야 했다.

선거의 결과는 유권자가 후보를 알고(인지도), 좋아해야 하고(선호도), 기표소에 들어가는 행위(투표참가율)가 종합된 것이다. 출마자가 경쟁력을 가지려면 선거 전에 인지도가 최소한 50%는 넘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치신인이 선거의 첫 번째 관문인 인지도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은 근본적으로 기득권 중심의 현행 선거법 때문이다. 37년간 선관위에서 일하면서 가장 개혁적이라고 하는 현재의 선거법을 만든 임 후보도 그 덫에 걸린 것이다.



부동층이 많은 이유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중앙선관위는 5월 28일 '5·31 지방선거 제2차 유권자 의식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선관위 의뢰로 코리아리서치센터가 지난 5월 21일~22일 전국 19살 이상 남녀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했으며,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2.5%다.

조사 결과, 전체 유권자의 58.5%가 5·31 지방선거를 9일~10일 앞두고도, 어떤 후보를 찍을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부동층'인 것으로 나타났다. 선택할 후보자를 결정했다는 응답율은 41.5%인 반면,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는 응답율은 58.5%로 더 높았다.

부동층의 경우 아직 결정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후보자를 잘 몰라서'가 46.3%로 가장 많았다. 특히 이런 부동층의 비율은 연령별로 20대에서 78.1%로 가장 높았고, 50대 이상에서 45.6%로 가장 낮게 나타났다.

지난 17대 총선의 경우도 비슷하다. 여론조사 결과 선거 일주일 전까지 지역구 후보의 신상을 알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43.0%에 불과했다.(중앙일보 2004년 4월 9일)

결국 유권자의 절반이 선거 직전까지 후보자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원인은 후보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처음으로 '매니페스토'가 소개되었다. 과거 선거의 공약이 빌 공자의 공약이었고 실현 불가능한 장밋빛 공약이었다면 매니페스토는 실현가능한 구체적인 예상과 수치를 명시한 공약으로 '참공약 선택하기'다.

매니페스토 선거가 불가능한 대한민국

매니페스토의 원조는 영국이다. 영국은 이념과 노선에 따른 보수당-노동당의 양당체제가 확립되어있기 때문에 영국의 매니페스토는 바로 '정당의 정책선거'이다. 지금으로부터 172년 전인 1834년부터 시작된 영국의 매니페스토는 정당정책과 이념에 따른 유권자들의 선택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기준이다.

예를 들어 청년실업 문제의 경우 노동당의 매니페스토 조항을 보면 '우리 노동당은 임기 5년 이내에 청년실업자 25만명을 해결하겠다' 며 그 방법과 예산, 기한, 로드맵이 아주 구체화 되어 있다. 이러한 공약은 5년 후에 선거에서 다시 평가를 받는 시스템이 정착되어 있다. 매니페스토 공약집은 우리 돈으로 한권에 만원 정도의 가격인데, 100만부나 팔리며, 영국 유권자들이 이 책자를 보고 자연스럽게 양 정당의 정강정책을 비교하는 토론이 일상화 돼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불과 3년 전인 2003년도에 매니페스토가 도입되었지만, 후보자 중심으로 정착되어 있다. 파벌정치, 금권·관권선거가 극심한 당시 상황에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자는 국민적 여론이 있었는데 이걸 해결해준 것이 매니페스토였다.

실현 가능하고 수치 예산이 포함된 아주 구체적인 공약으로 유권자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얻어 당선된 사례가 나타나면서 2003년도에 일본에서 가장 유행했던 단어 1위가 매니페스토였다.

예를 들면, 가나가와현의 마쓰지와 지사의 공약집을 보면 육아보육 문제의 경우 현재 우리 현의 보육시설수는 143대 1로 전국 최하위다, 이것을 1.5배인 220개로 늘려나가겠다, 기한은 2006년까지 하겠다, 예산은 30억엔 정도 드는데 이 예산은 어떻게 조달하겠다'는 식으로 구체화 되어 있다. 일본에서도 이런 공약집을 후보자는 유권자에게 판매하거나 배포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매니페스토에 입각한 정책공약을 만들어도 유권자에게 알릴 수 없다. 선거공보에 2쪽에서 4쪽 정도 싣는 것이 고작이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 5개 정당은 매니페스토 운동을 모범적으로 실천하겠다고 약속했다. 후보자 선정하는 과정에서부터 후보자들이 책임질 수 있는 공약을 제시하는지 점검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결국 말로만 끝난 약속에 불과했다.

이번 4월 임시국회에서 5당 정책위의장이 '기초단체장의 경우 16쪽, 광역단체장의 경우 32쪽 이내에서' 매니페스토에 입각한 정책공약집을 별도로 만들어 선관위를 통해서 가가호호 배포를 하고, 선거 기간에도 후보자나 배우자, 선거관계자가 배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입법을 합의한 바 있다. 그러나 국회 파행에 묻혀 이 법은 실종되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이번 서울시장 TV 토론에서 모 후보가 상대 후보에게 '언론기사를 보면 이런 공약을 말씀하셨던데...'라고 질문을 하면 '그 기사는 잘못 나온 것입니다'라고 답변하는 코미디가 연출된다. 어떤 후보도 문서화된 공약집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인가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보장하는 국가이다. 그러나 정치와 선거에 있어서는 기득권을 가진 현역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정치 신인간의 철저한 불공정 시장이다. 이러한 불평등한 선거 시장에서는 원천적으로 '신상품'(정치신인) 소개가 불가능해 소비자는 '익숙한 상품'(현역)만 선택하게 되어 있고, 그 잘못된 선택 때문에 4년간 고통을 받아야 한다.

정치 신인은 현행 제도 하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사전선거운동이 허용되기 전까지는 자신의 출마의사를 공공연하게 밝히는 것도 불법이다.

임좌순씨가 작년 2월 국회 정치개혁특위에 제출한 '선거운동의 합리적 개선방안'이라는 정책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사전선거운동을 제한하는 나라는 일본과 우리나라 밖에 없다.

미국 상원 의원인 힐러리 로뎀은 선거 18개월 전에 출마선언을 하고, 아무런 제약 없이 가가호호 방문 등 유권자와 꾸준하게 소통을 했다. 미국 민주당은 평상시 정당 활동에 참여하는 열성적인 자원봉사자가 100여만명이지만, 후보 선출을 위한 예비경선에 참여하는 지지자들은 2000여만명에 이른다. 유권자와 후보자가 서로를 잘 알기 때문에 우리 정당의 대표자를, 우리 동네의 일꾼을 뽑는데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선거문화 개혁의 핵심은 후보자와 유권자가 상호 소통을 확대하는 것이다. 후보자는 자신의 철학이나 비전을 유권자에게 충분히 전달할 수 있어야 하고, 유권자는 후보자의 자질과 능력 등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가져야 한다.

사전선거운동을 허용하면 조기 과열현상이 빚어질 것이라는 시각은 현역 중심의 기득권자의 입장이다. 이미 유권자 의식이 돈과 조직선거를 허용하지 않는다. 돈과 조직을 묶되, 자질과 비전을 겨루는 선의의 경쟁을 풀어주어야 한다.

지역문제에 대한 비전과 공약 경쟁은 과열될 수록 좋은 것이다. 적어도 지역일꾼이 되고자 하는 후보라면 지역주민의 애로사항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후보를 통해 유권자가 지역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누가 더 좋은 지도자인지 충분한 정보를 가질수록 지방자치와 우리 정치는 발전하게 된다.

공천비리, 묻지마 투표, 감성정치가 난무한 이번 선거를 계기로 선거와 정치가 불신의 대상이 아니라 유권자가 중심이 되는 생활정치가 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정창교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수석전문위원은 전 민주당 정세분석국장으로서 16·17대 총선과 대선, 그리고 지방선거를 현장에서 치렀으며 17대 총선에는 후보로 직접 출마하는 등 실전 경험이 풍부한 정치컨설턴트이다. 블로그 주소는 'blog.naver.com/nagazaa'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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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가자